종교, 신앙 코너

마음공부라는 것

kimhs71 0 113



불교 수행을 흔히 `마음공부`라 표현하는데, 정확하게 말하자면 매순간 자신의 의식과 잠재의식이 하는 모든 상카라 (생각, 감정, 말 포함)를 인지하고 탐진치를 제거하는 일이다. 이 마음챙김 (mindful)의 상태를 한 순간도 놓치지 않는 것이다.

불교의 업이론을 운명결정론식으로 오해하는 분들이 많지만, 사실 지금 이 순간의 나의 경험은: (i) 과거 (전생 및 이승의 과거) 업의 결과로 인한 조건들, (ii) 현재의 나의 의도, (iii) 현재 내 의도가 즉각적으로 갖는 효과 이렇게 세 가지가 복합적으로 상호작용한 결과라고 타니사로 스님은 설명하신다. (현재 시점에서의 내 의도가 장기적으로 갖는 효과는, 그 이후 시점들에서 가서 그 시점 기준 `과거 업의 결과로 인한 조건들`이 된다.) 특히 내게 `들어온다`고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감각 (5감+이성) 접촉, 즉 특정 감각 경험을 위한 조건들 및 가능성들은 과거 업의 결과다.

예를 들어, 내가 지금 심심한데 A라는 영화를 볼 수도 있고 B라는 친구와 만나 수다를 떨 수도 있다 이럴 경우, A라는 영화가 상영 중인 시공과 또 그 영화를 보러 갈 수 있는 조건들을 갖추고서 내가 현재 살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나에게 B라는 친구가 있다는 사실은 모두 과거 (전생 및 이승의 과거)의 내 상카라의 결과이며, 영화와 수다라는 가능성 중 무엇을 선택하느냐?라는 나의 현재 결정은 `지금 여기`에서의 내 intention, attention, perception (이하에서는 편의상 `사고방식`이라 부르겠다)에 달려 있다. 그리고 내가 영화를 보느냐 친구를 만나 수다를 떠느냐에 따라 많은 다른 경험들의 가능성이 각각 열린다. 친구를 만날 경우, 수다를 떨다가 친구의 어떤 얘기에 기분이 좀 상할 수도 있다. 이 시점에서의 내 사고방식에 따라 나는 또 좀 불쾌하지만 내색 않고 아무 일 없었던 듯 넘어갈 수도 있고, 그 자리에서 논쟁을 하다가 그 친구와 절교를 하게 될 수도 있으며, 이 두 극단 사이의 다른 많은 가능성들 역시 존재한다. 그리고 이 옵션들 각각은 또 새로운 많은 가능성들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이렇듯 한 찰나의 선택은 무수한 새로운 가능성을 우리에게 가져다 주고, 그런 무수한 찰나들이 한 생을 구성하며, 그런 무수한 생들을 우린 살아 왔다.

이렇듯 `지금 여기`에서 내게 주어지는 현실 조건과 선택 가능성들은 과거 업의 결과로서 형성되지만, 나는 나의 사고방식에 의해 그 가능성들 중 하나를 선택함으로써 나의 경험을 스스로 확정짓는다. 내 손으로 선택한! 경험이지 운명에 의해 주어진! 경험이 아니다. 영화와 친구라는 가능성은 과거 업의 결과였지만 친구를 만난 건 그 당시에서의 내 선택이었고, 친구로부터 불유쾌한 얘기를 들은 건 내 과거 업의 결과이지만 그걸 얼마나 불유쾌하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반응하느냐는 또 그 시점에서의 나의 선택이라는 거다. 내가 영화를 보러 갔다면 그 친구로부터 그런 얘기를 듣지 않았을 것이고, 내가 좀더 신중하게 반응했다면 절교로까지는 이어지지 않았을 거라는 말이다. (우리는 누구와 만나 어떤 종류의 관계를 얼만큼 유지하다가 어떻게 끝내는가?의 문제가 마치 우리의 통제를 벗어나는 운명인 양 생각하고 그런 뉘앙스로 `인연`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 실은 이 모든 경험의 `조건` 및 `가능성`만 과거에 의해 결정되었고 실제 경험의 `확정`은 매찰나의 선택에 의해, 즉 우리의 사고방식에 의한 우리 자신의 상카라에 의해서였다. 피해자를 비난하자는 게 아니라, 남을 컨트롤하는 건 옵션으로 두지 말고 자기 행동의 인과만 살피자는 것이 불교다.)

요약하여, (1) 우리는 끊임없이 먹이 (물리적 정신적 만족)를 추구하고 (upādāna) 그 과정에서 온갖 감각적 자극을 찾아 헤매며, (2) 매순간 감각 기관에 와닿는 무수한 자극들 중에서 극히 일부분에만 선택적으로 집중하고, (3) 나름의 과정을 거쳐 여러 가능성들 중 하나를 선택함으로써 `가능성`을 `현실`로 만들며, (4) 그 후 다른 추가적인 행동을 하면서 업을 계속 지어나간다. 이런 점에서 내가 하는 감각 경험은 외부로부터 나를 찾아들어오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내가 찾아나서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게 타니사로 스님의 설명이다. (이 내용 읽으면서 머리가 쭈뼛! https://www.facebook.com/media/set/?set=a.1249758302062917&type=3)

(여기까지는 타니사로 스님의 설명이고 아래는 그 함의에 대해 내가 생각해 본 것이다.)

윤회계에서 벗어나지 못 한 탓에, 과거 업으로 인해 형성된 모멘텀을 갖고서 달리고 있는 자동차(= 삶)에 올라타 있는 나 자신을 어느 날 정신차리고 보니 또 발견했다. 이 자동차를 내 의지대로 제어하려면 마음챙김을 항상 유지해야 하며, 그렇지 못 할 경우 내 과거 업의 결과가 마치 자율주행 시스템처럼 혼자 알아서 자동차를 운전하게 된다. 그리고 내가 깨어 있지 못 하면 나는 내 과거 업의 지배를 받으면서( =자동차 스스로 폭주하게끔 놔두고 좀비처럼 앉아만 있으면서) 그 자율주행 시스템을 변명만 하고 있게 된다. 좀비인 당사자에게는 모든 것이 `그럴 수밖에 없는 운명`으로 여겨지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본인이 운전대에서 손을 놓았기 때문일 뿐이다. 내가 운전대를 콘트롤하지 않으면 내가 올라탄 자동차는 내 과거 업의 결과를 제 발로! 찾아간다. (화를 잘 내는 사람은 멋지지 않은 외모를 타고나기 쉽고 질투가 많은 사람은 남들에게 인정받지 못 하는 내세로 연결되기 쉽다고 초기경전은 말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경향성일 뿐 특정 행동/성품과 내세의 조건이 1:1로 매칭되는 건 아니다. 그러나 현재에서 내가 좀비처럼 살면 저런 경향성이 실현될 확률이 점점 더 높아진다.)

정확히 몇 월 몇 일날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다는 구체적 시나리오는 아니더라도 뭔가 타고난 조건이나 경향성 같은 건 있다. 내가 태어난 시공이나 유전자 등이 그런 예로서, 이런 건 과거 업의 결과가 이미 무르익어 땅에 떨어졌기에 현재의 내 노력으로 완전히 바뀌지는 않는다. 마치, 임신1/3분기에 충분한 엽산을 섭취하지 않으면 태아에 특정 기형이 생길 수 있고, 임신 2/3분기나 3/3분기에 엽산을 아무리 많이 섭취한들 돌이킬 수 없으며, 출산 이전에 정확한 예측이 가능하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점성술이 가능한 원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특정 속도를 갖고 특정 방향으로 달려오는 자동차를 바라보면서 그 자동차가 10분 후 어디쯤에 도착할지 예측가능한 것과 마찬가지라는 얘기다. 하지만 운전자가 정신을 차리고서 매초 매순간 fully mindful & skillful하게 운전한다면 그 자동차의 속도나 진행 방향을 변화시킬 수 있으며, 그렇게 되면 점성술의 예측은 예측 당시에는 ‘정확’했더라도 결과적으론 그 예측과 동떨어진 상황을 빚게 된다. 바로 이것이 운명개척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소위 운명을 개척하고 싶다면, 과거나 미래로 우리를 데려가는 타임머신이 없는 이상 매 찰나 `지금 여기`에서 마음챙김을 통해 나의 모든 행동 (intention, attention, perception 포함)을 최대한 skillful (해탈에 도움되는. 탐진치 없는)하게 유지하는 것만이 유일한 길이다. 무수한 윤회를 거치면서 내가 살아 온 그 무수한 찰나들에서의 선택으로 인해 쌓인 태산 같은 업이 현재의 노력으로 하루아침에 바뀔 리는 물론 없고 나의 천성이나 적성 같은 것들처럼 이승의 노력만으로 180도 달라지지는 않을 부분들도 분명 존재하지만, `운명의`( =내 과거 업의) 노예로 살고 싶지 않다면 수행만이 유일한 선택지다. 그러다 보면 그 효과가 때로는 노력하는 순간부터 즉시 작용하기도 하고, 때로는 몇 달 혹은 몇 년 후 가시화되기도 하며, 때로는 몇 생 후 결실을 맺기도 하는 것.

남의 악업으로 인한 피해자 역할에 머물러야 내 악업을 소진시키는 것이 아니고, 그 상대를 멀리할 수 있는 만큼 가급적 멀리해야 오히려 나의 악업의 결과가 끝나는 것일 수도 있다고 타니사로 스님은 말씀하신다. (타인의 악업을 방조하는 건 선업이 아니다. 욕됨을 참는다는 의미의 `인욕`의 의의는 나의 노력으로 벗어날 수 없는 오직 그 경우로만 국한된다.) 부처님이 가르치신 업이론은 운명결정론이 아니며, 어떤 경우에도 타인에 대한 mettā는 물론 유지해야 하지만 지혜=분별력이 중요하다. 아무리 착하고 긍정적이어도 ‘치’가 결합되면 자신 and/or 타인의 고통으로 귀결되기 때문에, 불교수행은 `착하고 긍정적이기`가 핵심이 아니라 `mindful & skillful`이 핵심이다 - 메타인지가 있어야만 가능한. (기껏 인간으로 태어나 스스로 전두엽 기능 포기하겠다는 `영성인`들을 볼 때마다
더없이 안타까운 것도 바로 이런 이유다. 인간계 아래로 일단 떨어진 후 인간의 몸을 다시 받는 것은, 100년마다 한 번씩 숨쉬는 눈먼 거북이가 숨쉬기 위해 바다 수면 위로 머리를 내밀었는데 때마침 그 바다에 떠가는 통나무 조각에 구멍이 나 있어 그 구멍을 통과하여 거북이 머리가 쏙! 나오는 것만큼이나 낮은 확률의 일이라고 초기경전은 말하건만, 이 귀한 기회를 appreciate 못 하고 스스로 축생처럼 살겠다니. 인간의 이성을 잘못 사용하면 지옥으로 가는 것도 사실이지만, 천상계로 가거나 해탈하는 것 역시 인간의 이성을 사용 않고는 이론적으로도 불가능한 일이다.)


#73~107: The Karma of Now
https://www.facebook.com/media/set?vanity=keepsurfinglife&set=a.1233712733667474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오해 #4. Here & Now를 Fully Embrace & Appreciate 하는 것이 Mindfulness 마음챙김?`


`업이론은 운명결정론이 아니며, 업의 작동원리도 자판기처럼 단순하지가 않다`
https://www.facebook.com/keepsurfinglife/posts/1528436760861735

`타니사로 스님의 12연기 설명`
https://www.facebook.com/keepsurfinglife/posts/1429810934057652

`번역의 문제 3. Saṅkhāra (상카라)`
https://www.facebook.com/keepsurfinglife/posts/1633543037017773

`마음, 축복이자 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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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니사로 스님의 초기경전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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