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신앙 코너

- 전부와 일부 -

- 전부와 일부 -

한 마을에 심한 기근이 들어
두 친구는 가족을 떠나 먼 곳으로 돈 벌러 갔다.
그곳에서 한 친구가 심한 병에 걸렸다.
그러므로 다른 친구를 그의 집에 보내어 돈과 약을 가져왔고
둘은 얼마 후 큰 돈 벌어 돌아와
가족들과 함께 행복하게 살았다.
이 이야기에는 우정과 사랑과 신뢰가 가득하다.

남편이 먼 곳에 있는 한 여인의 집에 밤늦게 어떤 남자가 왔고
그 여인이 그를 반갑게 맞이하더니 이른 아침에 돈 등을 받아 갔다.
이 이야기에는 간음과 배신이 있어 보인다.

실은 위 두 이야기는 같은 이야기로서 전부 그리고 일부 일뿐이다.

성경의 전체는 안 보고 일부만을 보거나
또는 일부만을 보며 트집을 잡으려고 하면
위와 같은 큰 오류에 필히 빠진다.

어떻게 성경을 보는 것이 옳은가?
어떻게 믿음을 갖는 것이 옳은가?
이는 같은 질문이다.

믿음은 마치 남녀의 사랑 같아서 모두가 이래야한다 라는 정의는 없다.
각자가 하나님과의 관계로 믿음이 생기고 또 깊어가는 것이지
믿음은 누구의 강요나 주입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사상은 세뇌가 되도 믿음은 세뇌가 안 되며
또 세뇌시키는 방법으로 믿음을 키워가는 것은 위험하다. 

군대는 같은 유니폼에 같은 사상으로 무장돼야 하지만
교회는 각각의 옷을 입고 각각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신뢰로 무장돼야 한다.

군대는 상하 조직이 마치 피라미드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교회는 한 분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며 또 그 사랑을 서로 나누는 십자가 모습으로 이뤄진다.

혹 하나님 자녀들에게 요구되는 몇 안 되는 공통분모가 있다면
성경을 볼 때 주어를 하나님으로 보는 것과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기다리시고 참아주시고 품어주시는 좋으신 분이라는 사실을 그대로 인정하며 내 삶과 모든 이들의 삶을 보는 것 등이라 할 수 있다.

성경 첫 장 첫 절의 주어와 동사만 옮기면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친히) 하셨고 하시며 하실 것이라는 의미이다.

성경 마지막 장 마지막 절의 주어와 동사만 옮기면
“주 예수님의 은혜가 있을지어다.”이다.
이는 주님께서 은혜를 주셨고 주시고 주실 것이라는 의미이다.

예로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겠다고 하는 것 보다는
아브라함을 끝까지 지켜주시어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

다윗의 믿음을 본받겠다고 하는 것 보다는
다윗을 끝까지 지켜주시어 그리스도의 탄생과 구원의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

베드로를 감동케 하시어 고백케 하시는 하나님......,
바울도 회심케 하시어 쓰시는 하나님의 은혜......,

이런 마음으로 성경을 보고 은혜를 사모하는 것이 바른 믿음의 자세이다.

주어를 하나님으로 정하면 성경 전체를 보던 일부를 보던 각각이 받는 감동과 은혜는 달라도 오류를 범할 가능성은 적다.
결국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의지하며 살아야 하는 하나님의 자녀라면
사랑과 은혜의 주체는 당연히 하나님이셔야 한다.

내 마음도 내 가정도 뜻대로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니
내 마음의 주인도 내 가정의 주인도 하나님께서 되어주시길 원하고 또 그리 인정하는 것이 믿음의 시작이요 끝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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